발전하는 춘배
[독서] 시스템에 관하여; 『삼체 : 1부 - 삼체문제』 본문
※ 24년 8월 27일 작성한 원고를 바탕으로 옮겨 적음.
책 정보
- 『삼체 : 1부 - 삼체문제』
- 류츠신 저
- 이현아 역
- 자음과모음 (2020)
도입
책을 굉장히 오랜만에 들었다. 특히 소설은 진짜 오랜만이다. 올해 삼체라는 영화가 넷플릭스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넷플릭스는 보지 않지만 유튜브는 자주 보는 나는 알고리즘으로 관련된 영상을 몇 개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영화에 별 관심도 없었어서 영상도 대충 봤고, 그래서 나는 영화가 삼체 시스템에 있는 행성 사람들의 삶과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다뤘을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최근 어머니께서 삼체라는 책을 가져오셨다. 나는 기억에 잠깐 스쳐 지나가듯 존재했던 삼체라는 영화(를 다룬 영상)가 떠올랐고, 깔끔한 디자인의 표지를 가진 책이 마음에 들어서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 감상
나는 이 소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SF 소설이지만 일종의 추리 소설을 보는 느낌도 들었다.
과학계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실험 결과들, 그 비밀에 대해 접근하는 주인공, 밝혀지는 진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앞에서 나왔던 복선들이 모두 회수되면서 와! 싶었던 부분들이 많다.
책에는 과학적 요소가 많았다. 과학을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과학에 흥미가 있는 나에게는 이 책이 정말 재미있었다.
원자부터 우주까지 광범위한 주제가 등장하고, 때로는 전문적인 부분까지 깊게 들어가서 비전문가 입장에서 이게 진짜 과학인지 소설적 허구인지 구별하기 힘든 부분도 나온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도 진행되는데, 지식과 사상이 대립할 때 지식인들 각각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소설의 개연성도 대부분 과학의 틀 안에서 확보된다.
예를 들어, 예원제가 삼체인에게 지구로부터의 첫 정보를 전송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지구인인 예원제가 순수하게 안테나를 이용해서 외계에 신호를 보냈다고만 되어 있었다면 아무리 SF 소설임을 감안하더라도 20세기라는 시간적 배경 때문에 해당 내용을 납득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체는 예원제의 과학적인 사고 과정을 제시하여 개연성을 확보했다. 예원제의 연구 과정과 삼체 행성으로의 성공적 정보 전달이라는 결과는 과학적으로 매우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도 당연히 가능할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주요 인물들의 서사가 모두 탄탄하다고 느꼈다.
특히 핵심 인물인 예원제의 서사는 그녀의 딸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스토리,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이야기 순서로 쌓여가는데, 이 서사가 매우 탄탄해서 예원제가 하는 선택과 행동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빌런이지만, 쌓여온 서사 덕분에 예원제라는 인물 자체가 아닌 그녀를 그렇게 만든 시대적 배경과 사건들이 실제 빌런인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삼체인들의 서사도 탄탄하다. 거리를 특정할 수 없는 지구로부터 온 정보를 수신한 감청원은, 지구라는 행성에 자기들 삼체인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여 지구 문명을 지키고자 한다. 반면 삼체 행성의 지도부는 삼체 문명의 생존을 위해 지구를 침략하려고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책의 가장 후반부에 나오지만, 책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의 발단이 되어 책 전체의 스토리를 유기적으로 엮어준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적인 순서가 소설 속에서 뒤죽박죽이고, 공간도 게임과 현실을 왔다갔다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순서로 이야기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고, 재미있고 몰입감있게 술술 읽혔던 것 같고,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시스템
책을 읽으며 시스템에 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컴퓨터
책에는 '인간 컴퓨터'가 나온다. 가상 현실 게임 내의 삼체 행성에서 뉴턴과 폰 노이만이 삼체운동을 계산하기 위해 인간 3000만 명을 투입해서 만든 시스템이다. 3000만 명의 병사들 각각은 자신이 맡은 매우 간단한 역할만 수행한다. 가령, 앞의 두 사람이 모두 흑색 깃발을 들었다면 흑색 깃발을 들고, 한 명이라도 백색 깃발을 들었다면 백색 깃발을 드는 식이다. 이런 단순한 기능을 하는 사람들이 3000만 명이 모여 삼체 시스템의 태양 궤도를 계산하는 복잡한 미분 방정식을 푸는 것이다.
컴퓨터를 전공하는 나에게 이 부분은 정말 흥미롭게 다가왔다.
오늘날 엄청나게 발달한 프로그래밍 언어 덕분에 대부분의 개발은 거의 자연어에 가까운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Orbit o = computeOrbit();
print(o.next항세기);
영어만 알면 프로그램을 작성하지는 못할지라도 코드를 보고 대충 어떻게 돌아가겠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연어에 가까운 프로그래밍 언어에 익숙해진 나는, 컴퓨터는 0과 1로 이루어진다는,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근간을 잊고 있었다. 컴퓨터는 수많은 '두 개의 상태'들로 무수히 많은 것들을 표현해낸다.
한 사람의 두 손에 주어진 흑기와 백기.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논리 게이트. 논리 게이트들로 이루어지는 가산기, 레지스터, 메모리, 버스, 하드드라이브. 운영체제. 흑기와 백기를 들었다 내리는 병졸1은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운영체제라는 전체 시스템이 어떤 복잡한 계산을 해낼 수 있는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간단하고 반복적인 각각의 행동이 3000만 개 모여 무한히 복잡한 계산을 해내는 것, 이것이 시스템이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근간은 시스템이고, 컴퓨터를 이용해 만드는 소프트웨어도 시스템이다.
웹의 백엔드단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한다고 치자.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프로젝트 설계다.
프로젝트라는 전체 시스템에서 맡는 역할 별로 모듈을 나눠 각 모듈의 책임을 명확히 분리하고, 모듈들을 적절히 연결하고, 모듈 사이를 연결 할 때에는 어떤 데이터들이 오고가야 할지 계획하는, 이러한 것들을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프로젝트를 가장 빠르게 완수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특히 프로젝트의 수정, 확장에서 이러한 시스템 설계가 빛을 발할 것이다.
사회
단순하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스템의 밑바닥, 기반이 되는 그 단순함이 없다면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다.
흑기와 백기를 드는 병졸1이 없다면 진시황은 절대 삼체 운동 궤도를 계산할 수 없다.
세포가 없다면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거래가 없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존재할 수 없다.
원자가 없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시스템이다.
개인은 사회라는 시스템의 가장 밑바닥이다.
개인이 없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고된 현실에 지친 현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그저 시스템의 특성에 기인한 지극히 자명한 명제이다.
사회 시스템을 삼차원의 피라미드 구조로 매우 단순화해서 생각했을 때, 모든 개인은 1층에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UN 사무총장이나 대기업 CEO나 방금 태어난 갓난아기나 나나 모두 사회라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1층에 있다.
시스템 내에서 서로 맡은 역할이 다를 뿐, 모두 사회의 밑바닥일 뿐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피라미드의 2층에 개인은 없다.
사회는 시스템이다.
개인 각자가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서로의 성과를 주고 받는다면, 시스템의 힘에 의해 사회는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서 구체적이고 정교한 설계가 필요한데, 이것이 사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내가 할 일은, 그저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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