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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섣부른 판단에 관하여; 『안녕이라 그랬어』

춘배0 2026. 4. 15. 23:00

책 정보

  • 『안녕이라 그랬어』
  • 김애란 저
  • 문학동네 (2025)

섣부른 판단에 관하여

오해하지 말라. 오해는 왜 생겨나는가? 오해는 결국 판단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판단하지 말라. 함부로 판단하면 편향이 반영되어 오해하게 되고, 그 오해로부터 새로운 판단이 이루어지니 나의 판단과 진실 사이의 간극은 점점 커진다.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애초에 판단하지 않는 것이 정답일 지도 모른다. 정보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러나 정보란, 받아서 해석해야 정보로써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해석은 판단과 같은 것인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항상 이로운 것인가? 자동차가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면. 다시, 내 앞 30미터 부근에서 자동차가 60km/h의 속력으로 나를 향한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다면. 이때 '내가 죽겠구나' 판단하지 않는 것은 결코 이롭지 않다. 판단하고 행동해야 산다.

결국 판단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오해하지 말라. 오해는 왜 생겨나는가? '잘못 이해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원인-결과의 데이터 쌍이 잘못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해가 생겨난다. 어떤 결과에 대하여 그전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 중 내가 '원인'이라고 지목한 사건이 사실은 원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원인이 아닐 확률이 높다. 언어적으로 보면, 접속사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인상이 지저분하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 있다 하자. 이 사람이 식당 직원에게 반말을 하고 있는 '결과'를 보게 되면, 많은 경우 원인으로 '인상이 지저분하다'를 꼽는다. 그 사람에 대해 관찰한 사건이 사실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인상이 지저분하니 예의도 없는 것이다"의 추론 과정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한번 이렇게 추론이 이루어지면, 이러한 편향을 바로잡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첫인상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짧은 시간 동안 획득 가능한 정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그 사람을 관찰해보면, 식당 직원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결국 오해는 섣부른 판단 때문에 생겨난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 '섣부른 판단'과 그렇지 않은 판단의 경계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정보를 더 얻어야 하는가? 판단을 얼마나 유보해야 비로소 섣부르지 않은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소설을 읽는 내내 내심 불편했다. 이것저것 재고 비교하고 돈으로 환산하고 오해하는, 글로 쓰면 너무나 명백한 판단의 오류를 범하는 나라서, 이런 내가 이 소설 속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어서.


문장들

홈 파티

— 처음이라니 부담되는데? ... — 부담은 명예래 (14p)
많은 희곡 속 사건은 '초대'와 '방문', '침입'과 '도주'로 시작됐다.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누군가 무대에 등장해야 했다. 혹은 반대로 사라지거나. 그리고 지금은 이연이 퇴장할 시간이었다. (41p)

 

숲속 작은 집

학부 땐 그게 귀엽고 가끔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당해 보여 끌렸는데, 결혼 후 같이 살다보니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내가 예산을 맞추려 전전긍긍할 때도 지호는 "그냥 대충대충 해. 별 차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별 차이'에 대한 감각이 지호와 나의 큰 차이였다. (56p)
아마 나는 조금 서운했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인사와 미소가, 눈빛과 호의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64p)

 

좋은 이웃

남편은 잠시 침묵하다 "... 가진 사람들은 세금 몇 푼에도 펄쩍 뛰고 피해자가 되지 못해 안달인데, 정작 사다리에서 튕겨나간 나는 좀 속상해하면 안 돼?" 항변했다. 젊었을 때라면 나도 "우리가 아니라 사다리를 의심해야지"라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 말이 입에서 차마 안 나와 남편을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 돼. 그래도 어디 가서 그러지 마. 특히 회사 신입들 앞에서는.
그러자 남편이 허탈하게 웃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 그 신입이 나보다 부자인데?
우리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116p)
집 우, 집 주. 옛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큰 집이라 여겼다지. 그런데 어떤 존재들은 왜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실은 돌아왔는데, 몇 번 돌아왔었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우리가 깜빡하고 닫아놓은 문만 한참 바라보다 떠난 건 아닐까? (135-136p)

 

이물감

북극의 오로라, 열대의 낙조, 도시의 마천루, 얼룩 없는 창, 전선 없는 방, 보풀 없는 옷, 질병 없는 신체, 그림 같은 요리가 줄지어 늘어섰다. 마치 누군가 꾼 가장 좋은 꿈을 한데 모아둔 느낌이었다. (141-142p)
기태는 평소 자신을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성인이라 여겼다. ...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살면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자주 깨달아서였다. ... 더군다나 기태는 평소 판관을 자처하는 이들을 내심 혐오해왔다. 그런데도 기태는 차대표의 사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 눈빛이 아주 라스푸틴 같네. (162-163p)

 

레몬케이크

'같은 또래라지만 저 친구와 나는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구나. 아마 앞으로도 쭉 다른 고민과 다른 돌봄, 다른 고독 속에서 살아가겠구나' (191p)

 

안녕이라 그랬어

'하나마나한 말'을 최대한 진심어리게 하는 것도 어른의 화법일 텐데, 누군가의 부고와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가진 표현의 한계와 상투성에 어쩔 줄 몰라했다. 상투성이 뭐 어때서.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그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이는 게 결국 예의 아니던가. (221p)
큰 교훈 없는 상실. 삶은 그런 것의 연속이라고. (235p)
내 슬픔의 언어, 감정의 뿌리, 모국어 (242p)

 

빗방울처럼

'저 사람들, 어쩌면 저렇게 자기 삶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로 거리를 누빌 수 있지?' ...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오늘을 믿고, 내일을 기대하며 지낼 수 있지?' (266p)

 

해설

문득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게 중요해졌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말하지 않은 진실을 추가하기도 하지만 이미 말한 거짓을 바로잡는 데 더 마음을 쓰기도 한다. (293p)
이번 책에서도 '존재론적 단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리한 재현 역량은 '경제적 인간'의 내면을 탐사하는 표현 역량의 빛나는 지원을 받는다. 이를테면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135쪽) 느껴지는 마음과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감각에 몰두하는"(225쪽) 마음들, 그러니까 상향 대결 이후의 자괴감(「이물감」) 혹은 하향 대조 이후의 수치심(「숲속 작은 집」) 같은 것들과 대면하게 하는 것은 예술로서의 문학에 주어진 공적 임무다. (2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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